낯선 사람





“ 3권에는 오윤아, 백설 에피소드가 빠집니다.”


나는 <어서 오세요, 305호에>라는 웹툰을 좋아한다. 그런데 얼마 전에 그 웹툰의 단행본 소식이 궁금해져 작가의 트위터를 방문했다가, 그만 충격에 빠져버렸다. 윤아와 설이 빠진다니? 윤아와 설은 그 웹툰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인물이었다. 내가 인간관계에 회의를 느끼던 열일곱 살, 그들을 보며 사람 간 관계는 절대 내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저 웹툰이 연재 중이었던 때, 나는 윤아와 백설이 데이트를 하고 서로의 관계를 걱정하는 모습을 매주 안이 달아 기다렸다. 그들의 사랑은 시작부터 서로의 의지를 거슬렀고, 매우 현실적이었으며, 당시 아무리 노력해도 누군가를 좋아할 수 없었던 나에게 굉장히 와닿았다. 덕분에 남자친구를 사귀면서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나 자신을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은 내가 좋아하면 안된다고 생각해서 싫어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좋아하고 싶다고 생각해서 좋아할 수 있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후 2016년 2월, 대학교에 입학해서 지금의 내 여자친구를 알게 됐다. 처음 여자친구를 봤을 때 들었던 생각은 예쁘다는 것 하나였다. 이상하게 자꾸만 신경이 쓰이고 눈길이 가서 나도 모르게 그녀가 어디서 뭘 하는지 몰래 몰래 눈으로 쫓았었다. 그리고 그제야 어렴풋이 깨달았던 것 같다. ‘나는 남자를 좋아할 수 없구나.’


자꾸 그녀를 떠올린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좋아하는 감정이 되는 것은 한 순간이었다. 내 감정이 주체가 안 되어서 힘이 들 때 쯤, 그녀도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정말 신기하게도 서로 좋아한다는 고백 한 마디 없이 서로의 감정을 눈치 챘다. 그 날의 우리는 손을 마주잡고 앞으로 우리가 어떤 사이로 어떻게 만나야 할지 한참을 이야기했다. 3월, 그렇게 나는 내 생애 ‘첫’ 여자친구와 연애를 시작했고, 우리는 다들 그렇게 말린다는 CC가 되었다. 



연애를 시작하고,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5개월 동안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동생을 포함해서 아홉 명의 주변 사람에게 내가 여자를 만난다는 사실을 말했고, 그 중 고등학생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 둘(한 명은 정확히는 바이이지만) 또한 레즈비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8년을 붙어 지낸 가장 가까운 친구 한 명을 거의 잃다시피 했다.


내가 먼저 성 정체성을 밝히지 않았다면 영원히 몰랐을, 내 레즈비언 친구 J와는 사실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내 애인이 여자라는 사실을 알리고 난 후, 어느 샌가 J는 내가 가장 맘 편히 나의 모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한편 열네 살 때부터 친구였던 M의 경우에는, 아마 그녀가 독실한 크리스천이라 그러한 것이라고 여겨지는데, 내가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하고나서부터 어쩐지 먼 사이가 되고 말았다. 물론 나를 만나지 못할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M이 내 성 정체성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물었던 날 이후로 점점 연락이 뜸해진 것은 사실이다.


친구 두 명의 성 정체성을 알게 되었고, 친해질 줄 몰랐던 친구와 친해졌고, 멀어질 줄 몰랐던 친구와 멀어졌다. 또 우연히 내 지갑의 포토티켓을 본 엄마가 나와 여자친구의 관계를 미심쩍게 여기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 이 모두가 내가 여자이면서 여자를 만나서 일어난 일들이다. 사실은 많이 신기했다. 단지 나에게 여자친구가 생겼을 뿐인데, 나와 내 주변인들의 관계, 그리고

그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까지 많은 것이 바뀌었다. 정작 ‘나’ 라는 사람은 변한것 하나 없이 그대로인데.



나는 그대로이다. 나라는 사람은 그대로이고, 그렇기 때문에 나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여자를 만난다는 일로 구태여 나를 더 이해할 필요가 없다. 내가 여자를 만나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연애를 시작했을 뿐이다. 나는 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동성애자들을 이해한다, 존중한다 하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동성애자는 타인에 의해 이해받고, 존중받아야 하는가? 사람들은 일반적인 남녀 커플의 사랑을 굳이 이해하고 존중하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는다. 동성애자의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나와 내 여자친구가 나누는 감정의 교류는 남녀 간의 사랑과 똑같다. 나는 우리가 단지 여성 커플이라는 이유로 누군가의 이해와 존중을 받고 싶지는 않다. 내 사랑은 어떠한 평가와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내가 한 명의 인간으로서, 마땅히 사랑할 만한 다른 인간을 사랑하는 것뿐이다.


물론 사회에서 동성애자들은 “주류”가 아니기 때문에, 이성애자들과 똑같은 시선을 받기가 어렵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누군가의 사랑이, 타인의 이해와 존중을 통해 궁극적으로 “인정”을 받아야만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 또한 명백하다. 만약 누군가가 나를 받아들여 주겠다며 “너와 네 여자친구의 사랑을 존중해줄게.” 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 호의를 웃으면서 거절하고 싶다.



내가 바라는 것은 누군가의 이해와 존중이 아니라, '자연스러움'이다.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이 두 형태의 커플들을 모두 단순한 '연인' 으로 바라봐 주기를 바란다. 내가 여자와 손을 잡고 애정어린 시선을 나누고 있어도 눈에 띄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남녀 커플이 지나가는 것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듯이, 동성애자 커플이 지나가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여자를 사랑하는 나 자신을 그들이 있는 그대로 인식해 주었으면 한다. 언젠가 그런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길에서 여자 둘이 키스를 하고 있어도 시선이 가지 않는 세상. 남자 둘이 서로의 허리를 안고 사랑의 말을 속삭이고 있어도 호기심, 혹은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는 세상. 그런 날이 오게 된다면 더할나위 없이 만족스럽겠다.



요즘의 나는 하루하루를 행복에 잠겨 살아가고 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여전히 사랑스러운 내 사람 때문이다. 행복에 겨워 마냥 즐겁기도 하고, 또 문득 서로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이런 좋은 연애를 하게 된 것에 감사하게 된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이 사람이 아니면 또 누가 나를 이렇게 가득 채워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지금의 내 삶이 충분히 만족스럽다.


내가 감수해야 할 어려움들-자세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가족에 관련된 일들 혹은 주변의 시선과 부정적인 반응과 같은-에 치이다가도 애인의 품으로 돌아가 쉬게 되면 순식간에 마음이 편해진다. 그래서 결국에는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다.


대한민국에서 레즈비언으로 살아가는 것이 녹록치 않으리라는 것은 당연히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래도 내 옆에는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그대’ 가 있다. 그것이 내 전부라고 자부한다. 사랑하는 내 바다, 내 하늘. 서투른 나의 이십대를 열렬히 불태워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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