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글 | 심기용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처음 나왔을 때, 나는 격하게 공감했다. 내가 보아왔던 많은 사람들은 특정한 문제들에 대하여 오랫동안 고민하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고, 나아가 그러한 문제들을 사회적이거나 비판적인 지점으로 확장할 수 있는 능력 또한 많이 부족해보였다. 나는 인문학이란 우리에게 좋은 인식의 토대를 제공해주는 오래된 지혜라고 이해하였고, 따라서 이것을 사유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대학 내부에서 인문계열 학과들이 폐지되고, 대학 외부에서도 인문학에 대한 지원이 꾸준히 축소되고있는 실정은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들어 나는 ‘인문학의 위기’라는 표현에서 오히려 더 큰 위기감이 느껴지곤 한다. 만약 인문학의 위기가 인문학계에 소속된 인문학자들의 사회 제도적 위기를 의미한다면, 한편으로 이 시대의 위기는 인문학자들만의 위기인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더 멀리 내다보는 사회적 문제의식이 필요한 일이다. 가령 기본소득이라든가, 사회적 부 독점의 해소라든가, 기초학문 전반에 대한 지원 방안이라든가. 그러나 만약 인문학의 위기가 인문적 가치(사랑)의 위기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상당히 오만한 직관이 아닌가 싶다. 인문‘학’의 위기가 인문적 ‘가치’ 자체의 위험으로 느껴진다면, 인문적 가치라는 것을 최소한 인문학을 전공한 자들이 독점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이해하고 있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다음과 같이 묻고자 한다. 반드시 어떤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해야만, 우리는 사유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으며, 또 창조할 수 있는가?


언어를 통해 사유를 체계적으로 잘 정리한 것을 우리는 학문이라 부른다. 검증되고 예측되어온 인과관계들이 학문적 가설을 구성하고, 비판되고 계산되어온 논리들이 학문적 서술의 기저를 맴돌며, 사물의 본질로부터 인간의 삶까지를 관통하는 백과사전이 학문적 내용으로 기입된다. 그런데 (잠깐이라는 표현 삭제) 우리는 학문이 사유의 한 영역일 뿐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유는 학문보다 외연이 넓다. 이것은 사유 내에 언어를 통해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못한 주변적 영역들이 하나 이상 존재한다는말과 같다.


말하자면 사유라는 것은 그 자체로 반드시 언어적일 필요도 없고, 체계적일 필요도 없다. 사유는 어떤 것을 (사회적~ 삭제) 학문적 범주나 체계에 부합하도록 뻔하게 재현할 수도 있지만, 반면에 대상을 뻔하지 않게 새롭게 발견할 잠재력도 가지고 있다. 전자를 재인적 사유, 후자를 야성적 사유라고 부르는데, 야성적 사유가 재인적 사유를 가능케 한다. 왜냐하면 야성적 사유는 마주친 것을 어떤 틀에도 걸러내지 않은 본연 그대로의 사유, 곧 최초의 사유 자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유란 무언가를 감각하거나 지각하고 판단하는 일련의 모든 과정들을 총칭한다는 점에서, 최소한 감각능력이 있다면 모두 사유한다고 할 수 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고, 고양이도 낯선 사람이 다가오면 도망간다. 모두 나름대로 야성적 사유를 통하여 자율적으로 삶의 지도를 그려나갈 수 있는 역능이 있는 것이다.


인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언어를 통해 체계적으로 잘 정리된 사유를 모든 사람들이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달가워하는 것도 아니다. 재인적 사유를 통해 좋은 통찰을 얻어내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아예 그 과정을 수행할 능력이 없거나 지루해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어쩌면 삭제) 재인적 사유란 그다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마치 고양이들은 학문 없이도 잘 살아왔던 것처럼 말이다. 중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 즉 공동체를 구성하는 역능 자체이다.


당장 치매라는 질병을 가진 노인들에게 재인적 사유를 권한다고 생각해보자. 어르신, 그러니까 프롤레타리아가 뭐냐면요……. 섹스와 젠더가 구분되는데 우선 젠더라는 것의 정치적 효과는요……. 계몽주의적인 사회운동가들이라면 이러한 치매 노인을 상대 할 때 난처한 상황을 겪을 수밖에 없다. 운동가의 언어로 계몽해야만 할 텐데 제대로 소통이 안 될 테니 말이다. 운동가에게만이 아니라 가정에서든 정당에서든 노쇠한 사람들은 짐짝 취급당하기 십상이다. 신체가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사람들에게, 병든 노약자는 그저 부양의 대상이지 함께 하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존중되지는 않는다.


tvN <디어 마이 프렌드>에서 죽음이라는 한계선을 체감하며 사는 노인들의 솔직한 욕망들은 내게 꽤나 강렬하게 다가왔다. 남편이 심장병으로 죽고 치매의 경계에 서있는 희자, 황혼 이혼으로 자유를 꿈꾸는 정아, 젊은 예술인들과 어울리고 싶은 충남, 암의 아픔을 딛고 사는 당찬 배우 영원, 남편의 외도를 겪고 딸을 홀로 키워온 난희. 그들은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친구의 장례 소식이 일상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엄청난 형이상학 없이도 자유를 갈구하고 있고, 욕망하고 있으며, 서로를 돌보며 살아간다.


물론 노인들이 살아온 삶만큼이나 고집스럽고 경직된 사고방식을 가진 면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런 존재들을 마주해야 할수록 우리의 입장에서는 보다 의미론적인 것이 아닌 방식들로 공동체를 만들어나갈 수밖에 없다. 조금 더디고 느리고 비효율적이라도. 만일 합리적 토론이 가능하다면 논파하여 순식간에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도 있겠지만, 사랑으로 작동하는 공동체는 절대적인 옳고 그름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물들어가야 하기에 많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역량: 횡단성 계수 높이기



주변의 동료나 이웃이 치매에 걸리든, 지식을 갖추지 못하든, 언어능력을 상실하든 간에, 사랑이란 그러한 삶들과 함께 할 수 있게 하는 힘이다. 만약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그런 사랑의 역능이 크고 작은 방식으로 작용하는 장소라면, 논리적 언어, 정상적 기능, 고정적 의미의 차원에서만 맴도는 삶은 그 자체로 굉장히 부자연스럽고 배타적인 모습일 것이다. 이는 사실 세계는 끊임없는 변용의 연속이라고 주장하는 스피노자가 이미 전유했던 내용이기도 하다. 그는 변용이란 다른 것이 되어가는 것 즉 사랑이거나 물들어가는 것 즉 흐름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사랑 또는 흐름의 관점으로 보자면 중요한 것은 얼마나 내가 얼마나 잘 존재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나를 얼마나 잘 허물어뜨리는가의 문제에 더 가깝다. 나의 닫힌 세계를 외부에 열어놓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사랑이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고정된 존재를 해체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새롭고 강렬한 배치를 구성해내기 위한 시작 작업에 불과하다. 해체는 동시에 구성을 가능케 한다. 자유로운 해체와 구성이 향하는 방향은 의미와 무의미 사이의 유희이고, 질서와 무질서 사이의 변화이며, 제한과 무제한 사이의 무한이다. 해체적 전략은 허무주의로 향하자는 말이 아니다. 서구에서 일어났던 68혁명 당시 존재의 자유로운 욕망을 적극적으로 긍정한 철학자 질 들뢰즈에게 제자가 다음과 같이 물었다. “당신의 욕망의 철학이 말초적인 쾌락을 향하라는 것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경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들뢰즈는 이렇게 대답한다. “걸레짝이 되도록 파괴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런 젊은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이 있다면 오히려 ‘무너지지 말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여러 가지 고정관념이나 경직된 범주들을 부수는 것은 주류적인 권력으로부터 미시적인 공동체들이 가진 자율적인 힘이 긍정되기 위한 전략일 것이다. 제도적이거나 주류적인 방식을 모방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작고 세밀한 부분들 하나하나에서 익명적인 ‘우리들’의 특이한 상식과 범주 그리고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이제 사회의 작동방식은 효율적인 규범이나 보편적인 원리로부터 연역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미시적인 공동체들의 삶 자체로부터 귀납되는 형태를 취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구성과 변화를 프랑스의 활동가 펠릭스 가타리는 ‘미시정치’라고도 표현한 바 있다. 새롭게 구성될 공동체에서는 우리가 사회역사적으로 가져왔던 정체성을 내려놓는 연습을 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분리된 정체성들 사이의 사랑이 아니라, 익명적인 무언가들이 하나 되는 사랑. 예를 들어, 최근 많은 퀴어이론가들은 한결같이 이성애와 동성애라는 범주화가 근대 의학의 담론을 통해 구성되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 범주화를 통해 동성애 욕망이 병리적으로 이론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사랑에서 성의 범주가 중요하지 않다면, 그것은 동성애나 이성애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들의 혹은 누군가들의 사랑이 될 것이다.


따라서 사랑에 범주적 식별이 우선되어야 할 필요는 전혀 없다. 꼭 연애나 성애가 아니고 어떤 영역에서라도 우리들로서 혹은 누군가들로서 사랑을 구성할 수 있다. 게이, 레즈비언, 장애인, 인터섹스, 트렌스젠더, 여성, 이주민, 흑인 같은 존재들이 아니라 그저 우리 중 어느 누군가와의 만남. ‘식별’은 많은 경우 편리하고 효율적이지만, 지나칠 경우 언제나 배타적인 ‘차별’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노동자 계급 사이에서도 하위 프롤레타리아, 룸펜 등등 끊임없이 그 층위가 나뉘고 그 사이에 끊임없는 위계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진정한 문제는 특정 계급과 젠더의 헤게모니 장악이 아니라, 언제나 사랑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일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들뢰즈-가타리는 “자본주의의 유일한 계급은 자본가 계급밖엔 없다”라고 한 것이다. 민중은 다양체이지, 유일한 범주로 환원되지 않는다. 사랑의 공동체에서 본질적인 정체성은 없다.


그러므로 미래의 혁명은 차별과 식별의 틀을 더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을 차이로 만들어 내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의식적인 식별이 아니라 사랑하는 역량을 강화하는 일 자체이다. 가타리는 사랑을 누군가들의 사이를 횡단하는 힘이라고 설명하면서, 횡단성 계수가 높아지는 방향으로 공동체가 변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횡단하는 힘이 강해지면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에게서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고 색다른 재미를 느끼게 될 수 있다. 말하자면 사랑은 타자를 끊임없이 물음표로 바라보고,타자에 물음표를 남겨두고, 또 그러면서도 타자와의 만남 속에 고도로 몰입하여 다양한 맥락을 횡단하는 과정이다. 오로지 그 횡단의 힘만이 언어화되지 못한 누군가들과 함께 사회를 새롭게 구성해낼 수 있는 잠재적인 역량이 될 것이다. 요컨대 언어적인 학문체계의 오만함을 벗어내야만 우리는 삶의 지도를 새롭게 그려나갈 수 있다. 인공위성이 지구를 모두 찍어낼 수 있다고 해서 이제 지구상에서 사유할 수 있는 지점들이 완전히 고갈된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횡단할 새로운 차원은 우리 중 어느 누군가 사이에서 발견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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