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우연히 한 기사를 읽게 되었다. 대서특필 되지도, 큰 파문을 일으킨 기사도 아니었다. 하지만 제목만으로 내 이목을 사로잡았다. <김무성 "자유 유보해서 경제 발전, 이게 5·16 혁명">1) 우리나라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의 대표가 5·16혁명으로 표현한 것이다.

지금도 혁명과 쿠데타에 대해 배우던 날이 기억난다. 고등학생 시절 사회 선생님은 아주 간단히 이를 설명해주었다. “주체가 아래가 된다면 혁명이고, 위에서 일어난다면 쿠데타야.” 이를 자세히 설명하자면, 혁명은 피지배계급이 국민의 합의에 따라 정당성을 가진 정권 쟁취이고 쿠데타는 지배계급 사이에서 국민의 합의 없는 정권 탈취이다. 그렇다면 김무성 대표가 말한 5·16은 쿠데타일까 혁명일까.

 

이미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4·19 혁명으로 솟아오른 민주주의가 독재에 가려졌다.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이후 암살당하기 전까지 18년간 대통령으로 재임한다. 쿠데타라는 좋은 선례덕분에, 암살 이후 또 얼마 못 가서 전두환이 12·12 군사 반란으로 권력을 잡게 된다. 부당한 정권 탈취는 민주주의 후퇴를 시키고 자유를 억압했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처럼 있어서는 안될 희생을 낳았다. 불과 한 세대 전 이야기이다. 4·19 혁명부터 5·18 민주화운동을 거쳐 6월 항쟁까지. 길고 험한 민주화 정착 과정이 불과 30여 년 전에 끝이 났다.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현재의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민주주의가 있는 것이다.

만약 이 미화 발언이 틀렸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처음 한 번 쯤이야, 듣고 넘길 수 있다. 두 번, 세 번, 반복된다면? 일본이 후세를 공략하여 과거사를 왜곡하는 것과 같이 우리도 미화된 역사를 사실로 받아들일 것이다. 앞선 세대가 무엇 때문에 고통을 받았고, 무엇 때문에 투쟁했는지 본질을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같은 과오를 범할 위기에 처한다. 권력을 가진 자가 자신의 힘을 믿고 행하는 역사 미화에 우리는 놀아날 수도 있다.

 

 

이한열의 영정을 들고 경찰과 대치 연좌 시위하는 학생과 민주인사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세상은 참 아이러니하게 돌아간다. 고전 소설 속 악당들은 권선징악의 결말을 맞이했지만, 현실은 그와 달랐다. 군부 시절 이름 날렸던 고문 기술자는 회개하 여 목사가 되기도 하였고, 시민에게 총구를 겨눈 독재자는 젊은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아직 감정이 안 좋다. 나한테 당해보지도 않고라며 농담을 던진다.

우리에겐 정의를 구현시켜 줄 어벤저스도 없다. 힘이 없는 자의 말은 통하지도 않는다. 학생들은 취직과 학점 걱정에 허덕인다. 기득권들은 자기 이익을 더 남 기려고 아우성이다. 점점 더 살기 힘들어진다. 악순환에 빠진 것 같다. 먼 나라 이 야기가 아니다. 당장 우리 학교만 해도 이 문제는 드러난다.

학생 대표인 총학생회장이 조계종의 외압에 대해 반대 시위를 해도, 대학원 총 학생회장이 고공농성을 해도, 교수들이 단식 투쟁을 벌이던, 학교 측에서는 아무 런 반응이 없다. 시위에 동참하는 학생들이 학교 외부인에 의해 피켓이 찢기고 폭행을 당해도, 오히려 학생들을 제지한다. 이제는 서러울 지경이다. 어떻게 하 면 우리는 힘이 생길 수 있을까.

30여 년 전 우리 또래의 대학생들은 지금 우리의 설움보다 더 큰 설움을 느꼈 을 것이다. 군사 정권은 날이 갈수록 시민을 억압하고 무력으로 나아갔다. 이에 그들은 단결했다. 폭력에 맞서 뜻을 외쳤다. 학생들은 학교뿐이 아니라 거리로 나왔고 시민들도 동참했다. 힘이 없는 자들이 모여 힘을 만들어냈다. 계란이 모 여 바위를 깨뜨렸다.

 

 


 

 

INTERVIEW

<東國>은 대한민국의 민주화 역사상 격동의 시기였던 87년-88년에 주목했다. 당시의 대학생은 어떠한 생각을 가졌고 지금의 우리와 무엇이 달랐는지
에 듣기 위해 정치외교학과 88학번이자 편집위원이었던 이재용 선배님을 인터뷰했다.

 

정치외교학과 88학번 이재용                                                         ©동국교지

 

 

88년도의 사회

876월 항쟁은 사회 전체적으로 일어나는 민중운동의 시작이었지만 그것이 대 중적으로 퍼지고 대중적으로 힘을 갖게 된 것은 88년도부터였다. 876월 항쟁이 유명하기는 했지만 더욱 더 한국사회의 사회 운동에서 중요한 운동은 877, 8, 9 월에 일어난 노동자 파업 운동이다. 그 투쟁을 거치면서 노동자 운동이 조직화되고 세력화되어 본격적인 노동조합 운동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뿐 아니라 그동안 군사독재에 의해 억눌려있던 사회 모순이 87년 투쟁을 통해 사회 모든 분야에서 터 져 나왔다. 그리하여 88년도는 농민 운동, 사회 빈민운동, 시민 사회 운동, 그리고 학 생운동처럼 대학생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가 불을 뿜는 용광로 같은 시기가 되었다.

나는 이런 분위기가 팽창하는 88년도에 입학을 했다. 88년도를 거친, 86학 번, 87학번, 88학번 등은 운동을 했거나 안했거나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 러한 사회 분위기에 물들 수밖에 없었다. 그 때의 학생들이 지금 학생보다 더 머 리가 뛰어나거나 열정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 당시 한국사회가 관통하는 지점, 단순히 대학생들의 열정과 같은 차원의 문제 넘어 사회의 발전과 민주화 정도에 서 발생한 흐름이었다.

 

 

격변하는 사회 속 대학생

사회 문제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든 간에 그것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사회 속에서 그 누구도 자유롭지 않았다. 지금과는 다르게 그 당시는 학생 운동 이라는 것은 학생으로서의 당연한 사명, 지당한 일이었다. 학생으로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역할에 대한 고민의 해답이 운동이었다. 모두가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사람들도 미안하고 떳떳하지 못한 마음이 있었다.

학생들의 모임도 지금과 달랐다. 그 때에도 달달한 노래를 부르는 동아리나 춤, 밴드 같은 취미를 위한 동아리도 있었지만 지금보다는 훨씬 많은 숫자의 민중 운동 이나 학생 운동을 위한 모임이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과에서는 세미나가 열렸 다. 지금의 스터디가 전공이나 공부에 대한 모임이라면 이 세미나는 한국 사회의 모순과 운동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대부분 소위 운동권들이 학생회를 이끌고 있었기에 학생회 주도 하의 세미나는 학생 운동으로 이어졌다.

또한, 학내에는 항상 정치조직이 있었다. 당시 학생 활동은 학생 운동과 동격 화 되어 있었고 학생 운동세력은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누가 학 생 사회의 권력을 가져가느냐가 어떤 방향으로 학생 운동을 이끌어 가느냐의 문 제였다. 그때는 모든 사회가 민중 운동이란 말에 매몰되어 있었기에 학생 사회의 고유한 권리, 요구 조건보다는 한국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가에 대한 노 선투쟁이 더 중요시 되었다. 안타깝게도 이 노선투쟁은 학생들 서로가 편을 가르고 학생 사회의 분열을 야기했다. 양측 서로 학생회를 장악하고 학생 운동의 주도권을 쥐기 위한 심각한 내부 투쟁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딱딱하고 교조적인 분위기가 생겨 이 후의 발전을 저해했다고 생각한다.

 

 

교지 이야기

학도호국단이 폐지되고 민주적 학생회가 만들어졌고, 1986<東國> 교지도 이와 함께 탄생했다. 민주적 학생회에서 사람들이 모여 교지편집위원회가 만들어졌으니 얼마나 그 당시 학생 운동권의 핵심이었겠나. 당시에는 총장 직속의 독립 언론기구라고 명칭 되어 다른 학내 언론과 다르게 모든 결정을 교지편집위원회 자체적으로 할 수 있었다. 지도 교수도 편집위원회에서 선정하여 저명한 사회이론 연구가였던 교수님을 모시기도 했다. 저마다 뜻을 가진 서른 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교지편집위원회 활동을 하기 위해 찾아왔고, 나도 그 중 하나였다.

87-88년 교지는 대학 사회 내에서 선풍적인 인기였다. 그 당시 한국 사회 학생 운동의 중심이라는 평도 있었다. 교지에는 강령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정론에 의한 투옥을 각오하시오.’이다. 실제로 교지 글에 대해 경찰서에서 연락이 오고, 편집위원에게 미행이 붙고, 마치 일제 강점기처럼 인쇄소에서 중단된 경우도 많았다. 정말 감옥에 갈 것을 감수하고 도망갈 곳도 알아놓고 교지편집위원회 활동을 하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쉽게도 교지의 글에는 학생들의 이야기가 없었다. 학생들의 실제 생활이나 학생들의 요구나 바람이 없었다. 사회가 거칠고 거대한 흐름 속에 있었기에 그럴 여유가 없었다. 교지에는 사회 문제나, 한국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변혁이 되어야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고민들이 많았다. 그만큼 학생들의 관심사도 사회적 문제에 쏠려 있었다.

올해 1학기의 학내 이슈의 키워드는 표절 총장종단 개입이라고 알고 있다. 88년 교지를 보면 거의 유사한 사건을 볼 수 있다. 학생자주화투쟁. 당시에 교과과정 개편과 재단의 비리 등에 대하여 학생과 학교 측간에 큰 대립이 일어났다. 교과 과정을 왜 학교 마음대로 정하느냐가 주된 논란이 되었다. 학생들은 교과과정을 정할 때 학생들도 함께 참여해야 한다.’라는 주장이었다. 이 대립의 끝은 길고 긴 시간이 필요했지만 결국 학생의 승리로 끝났다. 학생 2000 명 이상이 모여야 성립되는 학생 총회가 열렸고 거의 모든 학생들이 수업 거부에 동참하였다. 이뿐 아니라 136일간 총장실을 점거하기도 했다. SNS도 없던 시절이었지만 사회 통합력은 높았다. 학교에 대자보가 가득 붙었고 학생들은 그 대자보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과 조직, 정치 조직, 동아리 등 다양한 학생모임을 통해 투쟁에 동참하였고 총학생회도 체계적으로 조직을 구성하여 홍보와 참여가 모두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그리하여 결국 학교 측과 학생 대표가 만나 합의를 성사시키고 학생들의 뜻을 이룰 수 있었다.

 

 

현재의 대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

학생 사회의 문제는 학생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학생 사회란 것은 결국 사회가 투영된 것이다. 사회는 변하였고 점점 더 세분화되어 가고 있다. 점차 뜻을 모으기는 어려운 시대다. 또한, 학생들이 너무 힘들게 학교를 다니고 있는 것 같아 안쓰럽다. 획일화 되어 있고 정해진 길만 존재하는 것 같다.

이제는 도서관에서 공부만 한다고 되는 시대는 지났다고 생각한다. 기업과 같은 사회의 보편적인 시각으로 봐도 이제 단순히 시키는 대로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이든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낼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창의적이고 열린 사고가 필요하다. 이것은 타인의 문제에 대해 관심과 공감, 배려, 그리고 사회의 모순을 바라보는 통찰력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선 내가 속해있는 사회에, 좁은 의미로든 넓은 의미로든, 모른 척하면 안 된다. 행동으로 이어나가는 것과 별개로 관심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사회를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늘 그랬듯이 세상은 혼란스럽다.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 그 어떤 것들의 대립이든 여전히 세상은 요동치고 있다. 방관자적인 태도도 판을 친다. 현재의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도 없는 일에 무관심한 태도를 갖는다. 다른 사람의 대립과 행동을 무가치하게 여기며 이해하려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우리 개개인은 무력하다. 아직은 재력도, 능력도 없다. 한명 한명의 외침은 세상의 소음에 파묻힐 뿐이다.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유명한 노랫말처럼 촛불하나 킨다고 어둠이 달아나나”. 작은 물고기가 큰 물고기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떼를 짓는 것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함께하는 것 밖에 없다. 곧 다가올 우리가 만든 세상에 우리가 외면하면 안 된다. 우리는 준비해야 한다.

 

 

신성운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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