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가장 끔찍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모든
전쟁 선전물, 모든 악다구니와 거짓말과 증오가 언제나
싸우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는 점이다…….’
- 조지 오웰, 『카탈로니아 찬가』中

 

 

 

뭐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라고 친구에게 말했던 날이 기억난다. 휴가 나온 녀석에게 내가 저녁을 사주던
날이었다. 몇 달 만에 만난 친구는 군대에서 얻어온 습진으로 손바닥이 붉었다. 친구는 취사병이었다. 온
종일 부엌에서 부대원들이 먹을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올바른 장비조차 갖춰져 있지 않은
곳에서 올바르지 못한 양의 업무를 처리해야 했다. 더군다나 올바르지 못한 서열관계 때문에 그는 여럿이
해도 부족한 일을 혼자 떠맡아야 하는 처지였다. 시뻘겋게 드러난 피부로 숟가락을 쥔 손이 안쓰러웠다.
신입생 때는 사회 정의니 뭐니 하는, 택도 없이 거대한 이야기로 나와 얼굴을 붉히며 토론하던 친구였으나
이제는 거대한 조직 안에서 숨죽이는 삶을 택하고 있었다.

 

“로버트 카파,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 (1936): 스페인에 인민정부가 수립되자 파시스트 세력은 이를
무너뜨리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한다. 스페인 시민들은 의용군을 조직해 맞섰으며, 세계 각지의 사회주의자, 아
나키스트, 지식인 또한 의용군으로서 참전해 싸웠다. 대표적으로 헤밍웨이와 조지 오웰 등이 있다.”

 

 

2년이니까. 친구는 그렇게 말했다. 군대란 인생에서 잠시 스쳐가는 곳일 뿐이니 굳이 맞부딪쳐봐야 흠
집도 내지 못할 부조리에 맞서는 것이 미련하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이 감당할 만한
한계가 있는 법이지, 이런 말로 그의 장단을 맞춰주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런 대화를 하는 우리 자신이 낯
설다는 생각이 들 무렵, 친구는 문득 나에게 물었다. 야, 동국대 지금 난리난 거 같던데. 총장 어쩌고, 그거
어떻게 된 거냐?

나는 일련의 사태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휴학한 신분으로서 학교의 상황을 직접 목도하지는 못
했지만 교지 편집위에 몸담고 있던 터라 건너들은 얘기는 많았다. 하지만 아직 거리에 드문드문 녹지 않은
눈덩이가 들러붙어 있던 때였다. 즉, 아직 보광이 총장자리에 앉기 전이었고 나는 막연한 희망을 갖고 있었
다. 그 희망이란 말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굳이 내가 휴학생 입장에서까지 뭔가를 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
까. 앞에서 늘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완전히 올바르게는 아니어도 어떻게든 되겠지. 나에게 학
교란 이미 떨어져나온 집단이었으므로 방관에 따른 죄책감은 강하지 않았다. 내가 살게, 라는 말을 친구에
게 하고, 계산대 앞에서 카드를 꺼내고, 내일 아침의 출근길을 벌써 귀찮아하며 나는 복잡한 일을 잊었다.
그렇게 싸늘한 거리를 걷던 중, 친구는 문득 나에게 어떤 말을 건넸는데 나는 한동안 그 말을 마음 속에
서 되풀이해 들었으며 지금까지도 잊지 못했다.


선악이 분명한 세상을 원했던 적이 있다. 절대적인 선과 절대적인 악, 이 둘 사이에 분명한 경계선이 있
어 모든 것이 명료해지기를. 보다 단순하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어린 시절에 보던 만화영화에서처럼 착한
놈과 나쁜 놈이 분명한 세상 속에서 내가 그 착한 놈의 편에 서 있기를 바랐다. 소위 ‘정의’라고 불리는 절
대적인 관념으로 무장한 채 나쁜 놈들을 죄책감없이 처단하면 모두가 행복한 사회가 도래하는 환상.
그 환상이 나의 세상살이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었음은, 거리에서 시위대에 섞여 있을 때 알 수 있었다.
책임을 회피하는 정부를 둔 국민이 진실을 인양하라고 외치는 모습에서는 애처로움을 넘어 곧 분노가 느
껴졌다. 공권력은 그 불길을 차도에 고립시켰다. 집회가 시작되기 며칠 전부터 계획된 차벽과 진압이었다.
경찰은 메가폰에 대고 해산을 명령했다. 지금 여러분들은 불법 집회를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여러분들을
정밀 채증할 것이며, 법에 따른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당장 해산하십시오. 오늘 가지고 있는 모든 최루액
과 물대포를 동원하여 여러분들을 진압할 것입니다……. 헌법을 무시하고 대법원을 무시하고 기본권과 민
주주의를 무시하는 자들이 말하는 질서, 준법, 불법 같은 단어들은 차라리 공허한 수식어에 가까웠다. 징
병제를 통해, 대한민국 남자라면 당연히, 따위의 말을 통해 국민들로 이루어진 진압 기동대를 만든 체제는
지능적으로 시위대를 탄압했다. 국민과 국민을 싸움 붙인 틈바구니에서, 이 모든 일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
한 근본적인 의문은 소멸되었다.

 

 

⁍ 2015년 5월 1일의 안국역, 세월호 집회 현장. 시위대는 안국역을 지나 광화문까지 행진할 계획이었으나, 경찰
이 미리 세워둔 차벽에 막혀 대낮부터 밤까지 안국역 일대에 고립되어 있었다. 경찰은 이들에게 해산을 명령했
고 저항하는 시위대에게 곧 최루액 섞인 물대포를 발사했다. (집회는 시민의 기본권이며, 시위대가 사회 안전에
구체적인 피해를 끼칠 것이 명확해지지 않는 한 경찰에게는 이들을 고립시키거나 해산을 명령할 권한이 없다)

 

 

남은 것은 소문뿐이었다. 시위대가 폭력적이라는 말. 단편적인 몇 장의 사진들을 통해 번져나갔다. 폭력
시위. 변질. 불법. 의경도 사람이다. 과격 분자. 빨갱이. 시체팔이. 정치적으로 변했다. 순수한 유가족이 아니
다. 등등. 언론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말들 속에서 선은 악이 되고 악은 선이 되었다. 복잡하게 뒤엉
켜 분명한 것이 없는 상황 속에서 나를 가장 분노케 한 것은 체제도 사회도 정부도 아니었다. 상황을 잘 알
지도 못하는 이들이 자행하는 왜곡이었다.
현장의 상황과 당사자들의 말을 보지도 듣지도 않은 사람들이 현상을 왜곡하는 것은 보편적이었다. 큰 사
회적 의제뿐 아니라 학내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퇴근하기 전, 가끔 SNS에서나 지인의 입을 통해
학교의 상황을 전해들었다. 종단은 더욱 노골적으로 비민주적 학사 개입을 일삼았고, 자신의 뜻대로 이사회
를 주물렀던 일면은 이사장이 되었으며, 법원은 그를 인정했고, 보광은 결국 총장이 되었다. 그리고 개중에
는 오묘한 논지를 펴는 학생들이 있었다. 대개 이런 식이었다. 얼핏 보니 종단이 잘못하긴 했지만 거기 대응
하는 학생들도 잘한 건 없지 않느냐. 왜 점거를 하냐. 왜 과격하게 구냐. 왜 위험하게 고공농성까지 하며, 자
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몇몇 학생들을 배척하느냐. 굳이 이 글에서 그런 말들을 조목조목 비판할 생각은 없
다. 다만 나는 저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단 한 번도 문제의 현장에 서보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한다. 다시 말
해 총학을 비롯한 범대위에서 일면 추대를 막기 위해 이사장실에서 밤을 지샐 때나 비공개로 보광을 총장으
로 추대하던 현장 말이다. 학사 개입을 중단하고 종단은 물러가라고 외치는 학생들을 경찰이 막고 있던 그
런 날.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면 그 날은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

 

 

5월 2일, 비공개로 진행된 290회 이사회에서 보광 스님이 총장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이 날 일부 학생들은 “종단개입
물러나라”, “대학자치 보장하라”를 외치며 집회를 열었고, 조계종 승려들은 학생들이 외치는 구호에 맞서기 위해 반야심
경을 큰 소리로 외웠다. 이 날 현장 취재를 나갔던 본지 기자는 한 스님에게 폭언을 들었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
신은 이 자리에 없었다.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조지오웰은 그 경험을 기록한 『카탈로니아 찬가』에 이렇게 썼다.
‘전쟁의 가장 끔찍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모든 전쟁 선전물, 모든 악다구니와 거짓말과 증오가 언제나 싸
우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는 점이다. (…) 그런 일은 후방의 기자들이 담당했다. 우리에게 반대하는
팸플릿을 쓰고 신문에서 우리를 헐뜯는 사람들은 모두 안전한 집에, 혹은 기껏해야 발렌시아의 신문사 사
무실에 있었다. 당 사이의 불화에서 비롯된 비방은 물론이고 모든 일반적인 전쟁 선전 활동, 즉 탁자를 치
며 열변을 토하거나, 과장된 영웅담을 늘어놓거나, 적을 헐뜯는 일들 역시 보통 모두 싸우지 않는 사람들,

많은 경우 싸우느니 차라리 백 킬로미터 가량 먼저 달아나겠다고 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것은 수십 년 전 파시즘으로부터 인민정부를 지키기 위해 펜 대신 총을 잡았던 조지 오웰의 목소리인
데, 기묘하게도 그다지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모든 갈등과 투쟁의 상황은 대개 보편적인지도 모른다. 그
상황에서 나뉘는 사람들의 위치 같은 것. 앞에서 싸우는 사람들과 그들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사건을 왜곡
하고 본질을 흐리고 과장하는 사람들. 나는 세월호가 지겹다고 말하는 자들과 보광 얘기 좀 그만 하라는
학생들 간에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월호 폭력 시위대가 정당한가?’라는 문구와 함께 수년
전의 다른 시위 자료를 내보냈던 어느 종편 채널과 세월호 시위를 ‘친북 세력과의 연대’라고 말했던 이대
학보의 칼럼, 그리고 종단을 탓하기보다 그에 맞서는 사람들을 깎아내리기 바쁜 일부 학생 간에도 큰 차이
가 없다고 생각한다.

 

 

안국역에서의 세월호 집회 이후, 5월 4일에 이대학보는 ‘세월호 집회를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자들이 있다’는 논지의 칼럼을 게재했다. 해당 칼럼은 사건의 진상규명과 시행령 폐기를 주장
하는 일련의 집회들이 ‘좌파 친북단체와의 연대’로 이루어졌으며 소위 ‘변질되었다’고 주장했
다. 이에 여러 대학의 언론사, 학생들은 이대 학보가 사실관계 파악에 미흡했고 주장의 근거가 부
족하며(‘친북 단체’라고 명명했으나 실제 어떤 단체가 어떻게 왜 친북적인지는 언급하지 않은
등), 실제 상황이 어떤지를 직접 취재하지도 않은 것으로 추정되는 데다가 악의적인 프레이밍을
저질렀다고 비판을 쏟아냈다. 곧 이대학보 측은 해당 칼럼 관련해 사과문을 게재했다.

 

 

그리고 나 자신도 당당하지는 못한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나는 휴학한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지. 다
른 사람들이 싸우고 있으니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라는 비겁한 생각으로 모든 게 원만히 해결되기를
기다리던 모습. 분통을 터뜨리고 잘난 척 말하지만 실은 멀찍이 떨어져 있을 뿐인 내가, 누군가를 탓하는
글을 써내는 지금 이 순간도 사실 희극적이다.
내일이 또 복귀네. 나는 저녁을 먹고 나와 싸늘한 거리를 걸으며 친구에게 말했다. 언제 또 보려나. 하여
튼 손은 좀 조심해라. 약도 바르고. 나는 친구의 붉은 손을 보면서 말했는데, 친구는 한참동안 대답을 않다
가 엉뚱한 말을 꺼냈다. 그런데 있잖아, 좀 진부하지 않냐. 뭐가? 지금 우리 모습 말이야. 대학 들어왔을 때
는 뭐 대단한 일이라도 할 것처럼 떠들다가 군대 갔다 오면서 부조리와 침묵을 습득하는 이런 모습, 되게
어디 소설이나 영화에서 많이 본 것 같지 않냐.
이건 너무 진부한데, 라고 말하고 나서 친구는 입을 다물었다. 다른 모든 말보다 ‘진부하다’는 말이 기억
에 남았다. 막연히 혐오했던 어른의 형상에 닮아가는 생활을 나는 살고 있었다. 안국역에서 쉼없이 밀려오
는 시커먼 경찰 앞에 서 있던 것도 이 글을 쓴 것도 그 전형적인 진부함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일지 모른
다. 멀찍이 떨어진 자리가 아니라 좀 더 최전선에 자리잡으려는 일. 죄책감이나 부채의식 때문일지도 모른
다. 시민 여러분 이쪽으로 모여주십시오. 우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이것은 안
국역에서 경찰에게 포위된 탓에 확성기 차량조차 가져오지 못한 세월호 시위대가 육성으로 시민들에게 외
쳤던 말이다. 최전선에 있는 사람들이 다른 세계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당신에게 기억을 촉구하고 함께 최
전선에 서기를 바라는 외침은 도처에 있다. 매운 연기 자욱한 거리뿐 아니라 어느 대학의 조명탑 위에도.
친구는 붉은 손을 마주 비비며 다시 부조리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 결국 보광 스님이 총장으로 선출되자, 최장훈 대학원 총학생회장은 보광 퇴진과 종단개입 규탄을 외치
며 만해광장의 조명탑에 올라가 고공농성에 돌입했다. 45일간 농성을 진행하던 그는 6월 4일 성토대회
날에 전면적인 투쟁을 준비하겠다며 농성을 중단하고 내려왔다.

 

 

 

박규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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